Chris Choi

Archive for the ‘History’ Category

화랑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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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 (花郞徒) 의 화랑 (花郎) 이라면 지켜야 했던 이념을 세속오계 (世俗五戒) 또는 화랑오계 (花郎五戒) 라 한다.

 

세속오계 (世俗五戒)

사군이충 (事君以忠) 충심으로 임금을 섬긴다.

사친이효 (事親以孝) 효심으로 부모를 섬긴다.

교우이신 (交友以信) 신의로 친구를 사귄다.

임전무퇴 (臨戰無退) 전장에 나가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살생유택 (殺生有擇) 생물을 해함에 구분을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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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Chris Choi

August 3, 2019 at 11:2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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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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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이완용이 누군지 아니?”

을사늑약에 참여한 사람이에요.”

 

또 하나의 설명이 따른다.

 

조선 사람이었는데 일본 사람이 되었어요.”

 

국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쇄락하는 조국 조선에 등을 지고 일본을 위해 헌신한 사람.

그는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예상했을까? 후손들을 위해 희생한 것일까? 아니면 조선이, 그리고 한국이 영원히 일본의 속국으로 남을 것이라 믿었을까? 멀리 내다 보지 못했던 기회주의자의 마지막 선택이 궁금하다. 아마도 자신의 묘가 허물어지고, 자신의 이름이 족보에서 지워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주의자

그가 친일의 DNA를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친일 행적 외에 그의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은 하나의 Frame이 작용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친일로 공격하고 매도하는 것. 그 만큼 그의 반역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완용의 생애 역시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기회주의자의 DNA를 타고 났다. 친청, 친미, 친러를 거쳐 친일까지. 그에게 민족과 역사관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취하고, 권력의 중심에 굳건하게 서는 것만이 중요했다. 먼저 양부에게서 살아 남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변심

그가 처음부터 친일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아관파천을 주도한 것은 친일 소행과 거리가 멀다.

3.1 운동은 그가 친일에서 반일로 돌아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버렸다.

 

타산지석

사람은 변한다.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도 하고, 나쁜 방향으로 변하기도 한다. 짐작이지만, 후자가 훨씬 많고 빠를 것이다. 나쁜 소식이 빠르고 나쁜 기운이 더 센 법이다. 이완용 같은 기회주의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쁜 선택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라 스스로를 위안했을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삶의 원칙, 역사 철학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고 살아갈 수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완용의 생애를 살펴 보며 느낀 것이다.

 

References

  • 이완용 평전, 윤덕한, 길, 2012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2, 2019 at 12:40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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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 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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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매요, 역사 그게 뭐라고 할매 귀한 인생 그토록 고생스럽게 사셨는교?

할매 인생보다 그 일이 곱절에 곱절은 더 중요했는교?

시간이 흘러도 어린 내 생각이 할매 마음에 닿기는 어렵겠지요?

 

할매 덕분에 이 세상 아직 살만하네예.

할매요, 이 세상 걱정 근심은 내려놓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시소.

 

 

[Video 1 출처: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YouTube Channel]

 

할머니 빈소를 찾고 빈소를 지키는 청년들, 고맙습니다.

Written by Chris Choi

January 31, 2019 at 1:3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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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게 역사 공부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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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는 즐겁게 해야 한다. 하고 싶어서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학창시절 공부는 즐거움은 최대한 배제되어야 했다. 대한민국 교육은 대실패라고 나는 확신한다. 특히 역사는 내 경우를 보면 교과서도, 선생의 가르침도 재미가 없었다. 시험을 위한 공부 이상이 아니었다. (물론 혼신을 다해 학생을 가르치는 선생도 있으리라 믿는다.)

요즘 역사 관련 도서를 자주 읽는다. 다큐멘터리도 가끔 찾아 본다. 그러다 내 말로 배운 것을 한 줄씩 정리해 보고 있다. 행간을 전혀 읽지 못했던 역사의 페이지들을 이해하는 재미가 대단하다!

 

[Link 1. ‘인조반정과 병자호란’]

 

학창 시절에 역사의 한 장면이라도 조금 깊이 이해하고 오늘의 비추어 해석하는 방법을 배웠다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달라졌을 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교육계는 반성하라!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11, 2018 at 4:13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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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과 병자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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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

광해군은 선조와 공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의주로 떠났다. 선조는 자신과 인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신성군을 총애해 세자로 세우고 싶었으나, 어린 나이와 중신들의 반대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했다. 자신의 망명을 대비해 선조는 파천 직전에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분조 (分朝) 를 맡겼다. 신성군은 피난 길에 죽었다.

 

命世子奉廟社分朝 上夜召從臣議曰: “予則當請內附, 世子宜奉廟社, 監撫留國。 誰肯從予渡遼者 

세자에게 종묘 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밤에 종신(從臣) 불러 의논하기를, “나는 내부(內附) 청하겠다. 세자는 당연히 종묘 사직을 받들고 감무(監撫)하면서 나라에 머물러야 것이다. 누가 나를 따라 요동으로 건너가겠는가.”

선조수정실록 26, 선조 25 6 1 기축 18번째기사

 

선조는 백성과 수도를 버리고 몽진한다. 적군이 배를 만들어 강을 건너지 못하도록 임진강 주변 인가를 철거한다. 적과 더불어 백성 역시 발이 묶이게 된다. 삼백 여 년이 지나 같은 장면이 역사에 기록된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국민을 두고 홀로 대전으로 떠난다. 잘못된 정보로 인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이 있었음에도 서둘러 한강 다리를 폭파했다. 이로 인해 군과 국민은 발이 묶이게 된다.

 

서울 시민 여러분, 안심하고 서울을 지키시오. 적은 패주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여러분과 함께 서울에 머물 것입니다.”

 

평양에 당도한 선조는 평양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하고서 다시 의주로 떠났다. 민심이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반해 광해군은 임진왜란에 잘 대처해 백성의 높은 신망을 얻게 되었다. 게다가 2년 간 생생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선조가 광해군에 대해 시기 혹은 적대감을 갖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광해군의 개혁과 실패

1602년 선조는 인목대비를 정비로 삼았다. 인목대비는 1606년 영창대군을 출산했다. 정인홍이 대표하는 대북 (북인) 은 광해군을, 유영경이 대표하는 소북은 영창대군을 왕으로 내세웠다. 1608년, 선조 역시 고민이 많았지만, 영창대군이 너무 어려 광해군을 선택했다. 선조는 왜 마지막까지 광해군을 왕으로 선택하는 데 주저했을까? 적자를 왕으로 두고 싶어서였을까? 아니면 백성의 신망을 받는 광해군에 대한 시기였을까?

이로서 북인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권력을 잡게 되었다. 전쟁 복구와 더불어 사회 개혁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인 개혁이 “대동법 (大同法)”이다. 기존에는 특산물을 현물로 바쳤는데, 불편이 커서 중간 상인이 대납하는 등의 문제점이 있었다. 게다가 빈부를 고려하지 않은 호별 부과였다. 대동법은 현물 대신 화폐 혹은 쌀 등으로 납부하게 했으며, 호별 부과를 토지별 부과 – 1결 당 12두 – 로 변경했다. 기존 수혜자들의 반발이 너무 커서 효종 때에 이르러서야 전국적으로 실시되었다.

명은 파병을 요청했다. 명은 쇠퇴하고 있었고, 누르하치의 후금은 뜨고 있었다. 임진왜란 중에 명이 파병을 해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 (再造之恩), 그러나 명은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파병을 결정하고 강홍립을 사령관으로 세웠다. 그를 통해 광해군은 중립 외교, 혹은 실리 외교를 펼치기를 원했다.

광해군은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향 보냈고, 영창대군은 그 곳에서 죽었다. 계축옥사 (辛壬獄事) 를 통해 대북파는 광해군에 반대하는 남인과 서인 세력을 제거했다.

 

인조반정

1623년 3월 13일, 인조반정 (仁祖反正) 을 통해 광해군의 조카인 능양군 (인조) 가 역모를 통해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냈다. 선조와 후궁인 인빈 김씨 사이에 태어난 정원군이 능양군의 아버지다. 정원군이 광해군의 이복 동생이므로, 능양군에게 광해군은 큰아버지다. 광해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인목대비는 교서를 내렸고, 광해군의 죄악 열 가지를 나열했다.

 

  • 폐모살제 (廢母殺弟): 인목대비를 폐위시키고 영창대군을 죽였다.
  • 궁궐 축제를 위한 대규모 토목 공사로 임진왜란 후 피폐해진 재정을 고갈시키고 백성들을 힘들게 했다.
  • 오랑캐를 받들었다.

 

인조는 이이첨과 정인홍 등 북인 세력을 처형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발생했다. 논공행상 (論功行賞) 에서 2등 공신을 받은 것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난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을 앞두고 김류가 나타나지 않자 동요하던 반정군을 추스른 것이 이괄이었다. 인조는 공주로 파천을 갔다.

 

척화, 주화

지고 있는 해인 명, 뜨고 있는 해 청. 척화는 명과의 화친을, 주화는 청과의 화친을 주장했다. 인조는 두 세력 가운데 끼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인목대비의 교서 내용처럼 청을 받들 수는 없었다. 청을 받들 경우 인조반정의 정당성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정묘호란

1627년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는 강화도로 떠났는데, 기마 민족이 해전에 약하기 때문이다.

후금과 형제의 관계를 맺음으로써 정묘호란은 막을 내렸다.

 

병자호란

후금은 형제의 관계를 넘어 명과 동일한 대우를 요구했다. 조선은 후금과의 관계를 파했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났다. 정묘호란의 후금이 청이 되었다.

청이 순식간에 남하하자, 왕실과 대신들은 강화도로 피난했다. 마침 강화도 피난길이 막혀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남한산성 안에서는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립이 극에 달했다. 두 세력을 대표하는 김상헌과 최명길.

45일을 버텼지만 결국 인조는 항복을 결정했다. 정축화약 (丁丑和約) 을 통해 청은 다음과 같은 요구 사항을 내세웠다.

 

  • 명과 외교 관계를 끊고 청과 외교 관계 수립
  • 청의 연호 사용
  • 청에 대해 형제의 예가 아닌 군신의 예를 갖춤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심양에 보냄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나와 한겨울의 날씨를 뚫고 삼전도까지 걸었다. 세 번 절 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 (三拜九叩頭禮)’ 까지 감수해야 했다. 심지어 이것은 여진족의 항복 의식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은 인조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도 비참한 일이었다.

 

上行三拜九叩頭禮

상이 절하고 아홉 머리를 조아리는 예를 행하였다.

인조실록 34, 인조 15 1 30 경오 2번째 기사

 

[Link 1. ‘남한산성]

 

소현세자는 청에 인질로 잡혀 갔는데, 천주교를 비롯한 서양 문물을 많이 접할 수 있었다. 조선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소현세자는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독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청에 굴욕을 당한 인조의 입장에서는 청을 두둔하는 소현세자가 못마땅했을 수도 있다.

많은 백성들 역시 청으로 끌려 갔는데, ‘환향녀’, ‘호로자식’이라는 말을 낳은 비참한 역사다. 약자를 품어 주지 못하고 겉치례만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는 아닐지 살펴볼 일이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사이에 10년이 있었다. 그 10년을 인조와 대신들은 어떻게 보냈는가? 큰 그림으로 조선을 둘러싼 국가들의 질서를 이해하고 있었는가?

임금은 하늘이 운명처럼 점지하는 것인가? 아니면 계략과 투쟁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자리인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감’이 되지 않는 임금은 백성은 물론이고 자신까지도 불행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References

  • EBS 평생 대학 역사이야기: 7. 병자호란, 신병주 교수
  • 남한산성, 김훈
  • 남한산성, 황동혁 감독
  • 만화 병자호란 1, 한명기 교수
  • 만화 병자호란 2, 한명기 교수
  • 병자호란 1, 한명기 교수
  • 병자호란 2, 한명기 교수

Written by Chris Choi

July 30, 2018 at 1:39 pm

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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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5.18을 북한군이 선동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런 것이 역사고, 이런 것이 사회인 것인가? 역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것이라 짐작해 본다.

시민을 성폭행 했던 계엄군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개새끼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이다.

‘87년 체제’가 ‘80년 체제’가 되지 못하도록 한 것만으로 5.18은 정당화 될 수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 알기나 하는가? 사과 한 마디 없는 그들은 역사 앞에 죄인이 될 뿐이다.

Written by Chris Choi

May 20, 2018 at 12:1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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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세 가지 질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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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강연에 이어 Startup Campus 강연에서 다시 뵙게 된 김상근 교수님. 인생에 대해 질문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Link 1. ‘Dolce’]

 

인문학

인문학이란 무엇일까요? 노를 잘 젓는 효율성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노를 잠시 내려놓고 고개를 들어 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 인생의 방향이 맞는지 성찰하는 것입니다.

Written by Chris Choi

November 27, 2017 at 1:1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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