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 Choi

Archive for the ‘History’ Category

중국 역사

leave a comment »

요순

당의 요임금과 우의 순임금. 태평성대의 시대.

 

왕조

걸왕의 폭정에 원한을 품은 말희는 왕의 관심을 이용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게 했다. 술이 가득한 연못, 고기로 가득한 숲은 탐욕의 상징이다.

 

왕조

요순과 반대로 걸주(桀紂)가 있다. 하 왕조의 걸과 은 왕조의 주. 폭군의 대명사이다. 달기는 말희와 마찬가지로 주지육림을 만들게 했다.

Written by Chris Choi

November 16, 2019 at 2:06 am

Posted in History

조선

leave a comment »

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후 정몽주는 걸림돌이 되었다. 권문세족을 타파하고 개혁을 원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는 고려 왕조 하에서 추진하고자 했다. 이것이 온건파 사대부와 혁명파 사대부의 차이였다. 이방원과 정몽주는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 받으며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명을 다했다. (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조선_Image 1.png

[Image 1]

 

태조

정도전은 방석을 지지했다. 신권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완벽한 권력자를 내린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Random’에 가깝다. 성군도 있었지만 패군도 있었다. 한 사람의 왕에 국가가 의지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것보다, 훌륭한 재상과 관료들이 왕권을 뒷받침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정도전의 사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했는데, 왕자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왕권 획득을 위해 악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태조실록 14, 태조 7 (1398) 8 26 1번째기사, 1왕자의. 정도전·남은·심효생등이숙청되다

 

죽음의 순간에 정도전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을까? 실록은 실록이다. 누군가의 관점이 개입된 기록이다.

이방석 역시 유배 후 목숨을 잃었다. 이방원은 실질적 권력을 획득했지만, 왕권에 대한 욕심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왕으로 세우지 않았다. 맏형인 이방은은 이미 사망했다. 둘째 형인 방과를 왕으로 세웠다.

 

정종

이방원의 형인 이방간이 왕권에 욕심을 두고 계략을 짰으나, 사전에 이방원이 포착해 제거되었다.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 (1400) 이다. 이것을 계기로 이방원은 자신을 왕으로 세웠다.

 

태종

태종의 핵심 정책은 왕권 강화에 있었다. 의정부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로 재편한 것은 신권에 대한 견제로 볼 수 있다.

Written by Chris Choi

November 4, 2019 at 1:34 am

Posted in History

백제

leave a comment »

황산벌 전투

[Daniel’s Question] 계백은 전투 전에 왜 가족을 해했을까요?

[Father’s Answer] 계백이 전쟁에 패하게 되면 남은 가족 역시 목숨을 잃거나 노비가 될 운명이었지.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그럴 바엔 차라리 먼저 목숨을 거두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였다고 해. 계백 장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 아마도 선봉에 선 장군이 그런 결정을 하면 그를 따르는 장수들과 군인들이 죽을 각으로 싸울 것이라 판단하기도 했을 거야.

또 다른 시각으로 본 사람이 있어. 영화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님이야.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전쟁과 인생, 전쟁과 가족이 과연 무엇일까?

Written by Chris Choi

October 1, 2019 at 10:26 pm

Posted in History

고종,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leave a comment »

도광양회 ()

흥선대원군은 때를 기다렸다.

 

철종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조대비는 고종을 선택했다.

 

고종, 명성황후, 흥선대원군_Image 1.png

[Image 1]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짝으로 민비를 선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민비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아이에게 보약을 보냈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숨졌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10

외척을 배제하는 데 성공해 정조의 장인인 김조선 이후로 60년 세도 정치 (척신 정치) 를 타파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의결 기관인 비변사를 폐지했다. (1865) 서원 철폐를 통해 족벌화 된 문벌을 타파한 것도 큰 공이다. 처음 서원이 설립된 취지는 긍정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적절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는 일종의 권력으로 탈바꿈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추진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강점이었다.

세금을 내는 대신 군역을 면제해 주었던 군포를 철폐하고 호포제를 시행했다.

국부는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변화는 이루지 못했다.

병인양요 (1866) 와 신미양요 (1871) 를 겪고도 선택한 쇄국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결정이었다. 척화비가 그 상징이다. 세상의 변화를 읽는 것에 흥선대원군은 무능했다. 아니, 세상의 변화에 눈 감은 것은 아닐까?

경복궁 재건을 위해 인두세를 걷고 노동력을 동원했다. 당백전을 주조해 경제 질서에 혼란을 야기했다. 꼭 우선 순위로 진행했어야 하는 일인가? 명분은 있었을 지언정 실리는 부족한 결정이었다.

최익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였다. 1873년 (고종 10년) 에 올린 계유상소 (癸酉上疏) 는 대원군의 10년 집권은 막을 내렸다. 섭정에서 벗어나 고종은 친정을 시작했고, 아버지의 권력욕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철폐했던 서원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임오군란 (1882)

민비의 외척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돈이 다른 곳으로 흘러 가니 오군영이 임오군란 (1882) 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개월 간 급여가 밀렸다. 민비의 과도한 사치와 굿도 큰 몫을 했다. 비판이 일자 그나마 지급한 한 달 치 급여도 형편 없는 곡식이었다.

임오군란을 통해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게 된다.

 

동학 농민 운동 (1894)

동학 퇴치를 위해 청군을 끌어들였다. 조선 땅에 청과 일의 군을 동수로 둔다는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왔다.

 

을미사변 (1895)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乙未事變) 이 일어났다.

 

을사늑약 (1905)

 

조선의 국모?

여러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명성황후를 조선의 국모로 받든다. 과도한 해석은 아닐까? 과도한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까? “미스터 션샤인”이 그리는 고종의 모습도 과도한 것은 아닐까?

‘명성황후 (明成皇后)’, 그리고 ‘민비 (閔妃)’. 호칭도 논란이다. 민비로 부르는 것이 격을 낮춘다는 의견이 있다. 일본이 의도한 바라는 의견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다.

 

References

  • 매천야록, 황현
  • 한국통사, 박은식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23, 2019 at 1:48 am

Posted in History

신라

with one comment

골품 제도

성골-진골-6두품-5두품-4두품-3두품-2두품-1두품

 

화랑도, 세속오계 (世俗五戒)

화랑도 (花郞徒) 의 화랑 (花郎) 이라면 지켜야 했던 이념을 세속오계 (世俗五戒) 또는 화랑오계 (花郎五戒) 라 한다.

 

  • 사군이충 (事君以忠) 충심으로 임금을 섬긴다.
  • 사친이효 (事親以孝) 효심으로 부모를 섬긴다.
  • 교우이신 (交友以信) 신의로 친구를 사귄다.
  • 임전무퇴 (臨戰無退) 전장에 나가서는 물러나지 않는다.
  • 살생유택 (殺生有擇) 생물을 해함에 구분을 둔다.

 

장보고

장보고는 골품 제도가 그에게는 제약이 되었다. 당으로 떠나 장군으로 성공했으며, 당에 정착한 신라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했다.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설치하고 (828년), 신라인들을 괴롭혔던 해적들을 소탕했다.

 

신라였을까?

왜 고구려가 아닌, 백제가 아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을까? 국립 중앙 박물관의 통일 신라관에서 만났던 질문이다. 이질적 문화에 배타적이지 않았다. 외교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화랑을 통해 젊은 인재들을 확보했다.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3, 2019 at 11:22 pm

Posted in History

이완용

leave a comment »

아이가 역사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에게 물었다.

 

이완용이 누군지 아니?”

을사늑약에 참여한 사람이에요.”

 

또 하나의 설명이 따른다.

 

조선 사람이었는데 일본 사람이 되었어요.”

 

국적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쇄락하는 조국 조선에 등을 지고 일본을 위해 헌신한 사람.

그는 친일파의 ‘대명사’가 되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는 예상했을까? 후손들을 위해 희생한 것일까? 아니면 조선이, 그리고 한국이 영원히 일본의 속국으로 남을 것이라 믿었을까? 멀리 내다 보지 못했던 기회주의자의 마지막 선택이 궁금하다. 아마도 자신의 묘가 허물어지고, 자신의 이름이 족보에서 지워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기회주의자

그가 친일의 DNA를 갖고 태어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친일 행적 외에 그의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것은 하나의 Frame이 작용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친일로 공격하고 매도하는 것. 그 만큼 그의 반역은 비난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역사는 다양한 관점에서 살펴 보아야 오늘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이완용의 생애 역시 전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는 기회주의자의 DNA를 타고 났다. 친청, 친미, 친러를 거쳐 친일까지. 그에게 민족과 역사관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에게 유리한 기회를 취하고, 권력의 중심에 굳건하게 서는 것만이 중요했다. 먼저 양부에게서 살아 남는 법을 배웠을 것이다.

 

변심

그가 처음부터 친일의 편에 섰던 것은 아니다. 독립협회를 만들고 아관파천을 주도한 것은 친일 소행과 거리가 멀다.

3.1 운동은 그가 친일에서 반일로 돌아설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기회를 버렸다.

 

타산지석

사람은 변한다. 좋은 방향으로 변하기도 하고, 나쁜 방향으로 변하기도 한다. 짐작이지만, 후자가 훨씬 많고 빠를 것이다. 나쁜 소식이 빠르고 나쁜 기운이 더 센 법이다. 이완용 같은 기회주의자가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나쁜 선택을 하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선택이라 스스로를 위안했을 것이다.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삶의 원칙, 역사 철학을 마음에 품고 살아야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구별하고 살아갈 수 있다. 어려운 일이지만, 이완용의 생애를 살펴 보며 느낀 것이다.

 

References

  • 이완용 평전, 윤덕한, 길, 2012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2, 2019 at 12:40 pm

Posted in History

할매 나비

leave a comment »

할매요, 역사 그게 뭐라고 할매 귀한 인생 그토록 고생스럽게 사셨는교?

할매 인생보다 그 일이 곱절에 곱절은 더 중요했는교?

시간이 흘러도 어린 내 생각이 할매 마음에 닿기는 어렵겠지요?

 

할매 덕분에 이 세상 아직 살만하네예.

할매요, 이 세상 걱정 근심은 내려놓고,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시소.

 

 

[Video 1 출처: CBS 시사자키 정관용입니다 YouTube Channel]

 

할머니 빈소를 찾고 빈소를 지키는 청년들, 고맙습니다.

Written by Chris Choi

January 31, 2019 at 1:34 am

Posted in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