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ris Choi

Archive for the ‘History’ Category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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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는 왜 박정희 대통령 ‘각하’에게 총을 겨눴을까? 법정에서의 최후 진술만으로, 시대적 정황만으로 진실을 규명하기는 어렵다. 개인의 생각은 수시로 바뀌었을 것이고, 시대적 해석은 왜곡의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알 수 없는 진실이기에 책으로, 드라마로, 그리고 영화로 사람들은 각자의 해석을 한다.

 

강경, 온건

국민의 투쟁을 앞에 둔 정권의 선택은 강경과 온건 중 하나다. 강경을 주장하는 차지철, ‘상대적으로’ 온건을 주장하는 김재규.

 

Trigger

김재규의 행동은 계획적이었을까? 아니면 우발적이었을까?

계획적이었다면, 그는 왜 계획을 세우고 계획을 실행했을까?

우발적이었다면 무엇이 역사를 바꾸어놓을 행동을 하게 했을까?

계획적이었든 우발적이었든, 무엇이 공통적으로 행동을 취하게 했을까? 민주주의가 그 가운데 있었을까? 그리고 차지철 역시 그 어딘가에 있었을까?

 

육본, 남산

김재규가 육본이 아닌 남산으로 갔다면 상황은 달라졌을까?

 

자유 민주주의

10.26으로 자유 민주주의는 회복되었는가? 당장 회복되지는 못했지만, 훗날 회복의 계기가 되었는가? 단기적으로는 전두환의 등장으로 자유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여전히 멀었다.

5.18이 당시에 소중한 빛을 발했더라면 10.26의 평가는 지금과 달라졌을까?

 

미국

만약 10.26이 없었다면 Jimmy Carter 정부는 어떻게 대응했을까?

 

하야

국민의 투쟁을 폭동으로 해석하고 강경 대응하는 대신, 10.26 이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하야를 선택했다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권력을 노리는 자들의 투쟁이 있었을까? 물론 전혀 가능성이 없는 가정이다.

상황은 크게 다르지만,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 전에 하야를 선택했다면 2017년 이후의 대한민국 역사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궁금하다.

Written by Chris Choi

January 25, 2020 at 1:32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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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퓌스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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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독일에게 전쟁에 패한 프랑스에서는 반독일 기류가 팽배했다. 더불어 반유대 감정도 높아졌다. 그 와중에 독일계 유태인이자 프랑스 육군 대위였던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독일로 정보를 유출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었다. 무죄를 주장했지만 그는 변호권도 보장 받지 못했다. 종신형을 받고 유배되었다. 진범이 잡혔으나, 관련 세력에 의해 은폐된다.

유대와 반유대의 충돌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과 닮은 점이 있다.

혐의의 근거가 되었던 문서와 드레퓌스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주장 역시 묵살되었다. 재심을 통해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강기훈님 생각이 난다.)

에밀 졸라의 “나는 고발한다” (J’accuse!) 같은 지식인들의 외침도 상징적이다.

Written by Chris Choi

January 9, 2020 at 9:02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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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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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은 소리소문 없이 왔다. 준비 없이 광복을 맞았기에 혼란을 피하기 어려웠다. 중립 없는 극단, 이익에 혈안.

강대국 속에서 민족의 목소리를 낼 틈도 없이 남북은 분단되었다.

친일 청산은 요원한 일이 되었다. 두고두고 이 사회를 어렵게 한 요소 중 하나다.

Written by Chris Choi

January 2, 2020 at 12:45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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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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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순

당의 요임금과 우의 순임금. 태평성대의 시대.

 

왕조

걸왕의 폭정에 원한을 품은 말희는 왕의 관심을 이용해 주지육림(酒池肉林)을 만들게 했다. 술이 가득한 연못, 고기로 가득한 숲은 탐욕의 상징이다.

 

왕조

요순과 반대로 걸주(桀紂)가 있다. 하 왕조의 걸과 은 왕조의 주. 폭군의 대명사이다. 달기는 말희와 마찬가지로 주지육림을 만들게 했다.

Written by Chris Choi

November 16, 2019 at 2:06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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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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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화도 회군

위화도 회군 후 정몽주는 걸림돌이 되었다. 권문세족을 타파하고 개혁을 원한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었지만, 그는 고려 왕조 하에서 추진하고자 했다. 이것이 온건파 사대부와 혁명파 사대부의 차이였다. 이방원과 정몽주는 하여가와 단심가를 주고 받으며 입장 차이만을 확인했고,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명을 다했다. (실록에 남아 있는 기록은 없다고 한다.)

 

조선_Image 1.png

[Image 1]

 

태조

정도전은 방석을 지지했다. 신권 강화를 위한 포석이었다. 왕은 하늘이 내리는 것이라고 한다. 완벽한 권력자를 내린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오히려 ‘Random’에 가깝다. 성군도 있었지만 패군도 있었다. 한 사람의 왕에 국가가 의지해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는 것보다, 훌륭한 재상과 관료들이 왕권을 뒷받침하는 것이 안정적이라는 것이 정도전의 사상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했는데, 왕자들이 자신들의 사병을 왕권 획득을 위해 악용할 수 있다는 계산에서였다.

왕권과 신권의 대립은 이방원과 정도전의 대립으로 이어진다. 제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은 정도전을 제거했다.

 

배가 불룩한 사람이 집에 들어왔습니다.”

예전에 () 이미 나를 살렸으니 지금도 또한 살려 주소서.”

태조실록 14, 태조 7 (1398) 8 26 1번째기사, 1왕자의. 정도전·남은·심효생등이숙청되다

 

죽음의 순간에 정도전이 비굴하게 목숨을 구걸했을까? 실록은 실록이다. 누군가의 관점이 개입된 기록이다.

이방석 역시 유배 후 목숨을 잃었다. 이방원은 실질적 권력을 획득했지만, 왕권에 대한 욕심을 숨기기 위해 스스로를 왕으로 세우지 않았다. 맏형인 이방은은 이미 사망했다. 둘째 형인 방과를 왕으로 세웠다.

 

정종

이방원의 형인 이방간이 왕권에 욕심을 두고 계략을 짰으나, 사전에 이방원이 포착해 제거되었다. 이것이 제 2차 왕자의 난 (1400) 이다. 이것을 계기로 이방원은 자신을 왕으로 세웠다.

 

태종

태종의 핵심 정책은 왕권 강화에 있었다. 의정부를 폐지하고 6조 직계제로 재편한 것은 신권에 대한 견제로 볼 수 있다.

Written by Chris Choi

November 4, 2019 at 1:34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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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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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벌 전투

[Daniel’s Question] 계백은 전투 전에 왜 가족을 해했을까요?

[Father’s Answer] 계백이 전쟁에 패하게 되면 남은 가족 역시 목숨을 잃거나 노비가 될 운명이었지.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한 상황에서 그럴 바엔 차라리 먼저 목숨을 거두는 것이 나을 거라 생각해서였다고 해. 계백 장군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 생각을 한 끝에 내린 결정이겠지? 아마도 선봉에 선 장군이 그런 결정을 하면 그를 따르는 장수들과 군인들이 죽을 각으로 싸울 것이라 판단하기도 했을 거야.

또 다른 시각으로 본 사람이 있어. 영화 『황산벌』의 이준익 감독님이야.

 

호랭이는 가죽 땜시 뒤지고, 사람은 이름 땜시 뒤지는 거여.”

 

전쟁과 인생, 전쟁과 가족이 과연 무엇일까?

Written by Chris Choi

October 1, 2019 at 10:26 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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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명성황후, 흥선대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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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광양회 ()

흥선대원군은 때를 기다렸다.

 

철종은 후사 없이 사망했다. 조대비는 고종을 선택했다.

 

고종, 명성황후, 흥선대원군_Image 1.png

[Image 1]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짝으로 민비를 선택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민비가 권력을 휘두르는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의 아이에게 보약을 보냈는데, 병세가 악화되어 숨졌다.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의 관계가 악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흥선대원군의 10

외척을 배제하는 데 성공해 정조의 장인인 김조선 이후로 60년 세도 정치 (척신 정치) 를 타파했다. 권력의 중심에 있던 의결 기관인 비변사를 폐지했다. (1865) 서원 철폐를 통해 족벌화 된 문벌을 타파한 것도 큰 공이다. 처음 서원이 설립된 취지는 긍정적이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적절하지 않은 힘을 발휘하는 일종의 권력으로 탈바꿈했다. 해결해야 할 문제를 분명히 인식하고, 좌고우면 하지 않고 추진한 것은 흥선대원군의 강점이었다.

세금을 내는 대신 군역을 면제해 주었던 군포를 철폐하고 호포제를 시행했다.

국부는 증가했다. 그러나 새로운 산업을 일으켰다거나 하는 변화는 이루지 못했다.

병인양요 (1866) 와 신미양요 (1871) 를 겪고도 선택한 쇄국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는 결정이었다. 척화비가 그 상징이다. 세상의 변화를 읽는 것에 흥선대원군은 무능했다. 아니, 세상의 변화에 눈 감은 것은 아닐까?

경복궁 재건을 위해 인두세를 걷고 노동력을 동원했다. 당백전을 주조해 경제 질서에 혼란을 야기했다. 꼭 우선 순위로 진행했어야 하는 일인가? 명분은 있었을 지언정 실리는 부족한 결정이었다.

최익현은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렸다. 무리한 경복궁 중건 등 흥선대원군을 비판하는 상소였다. 1873년 (고종 10년) 에 올린 계유상소 (癸酉上疏) 는 대원군의 10년 집권은 막을 내렸다. 섭정에서 벗어나 고종은 친정을 시작했고, 아버지의 권력욕에 대한 불만이 해소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철폐했던 서원은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임오군란 (1882)

민비의 외척들은 매관매직을 일삼았다. 돈이 다른 곳으로 흘러 가니 오군영이 임오군란 (1882) 을 일으킨 것은 당연한 일이다. 13개월 간 급여가 밀렸다. 민비의 과도한 사치와 굿도 큰 몫을 했다. 비판이 일자 그나마 지급한 한 달 치 급여도 형편 없는 곡식이었다.

임오군란을 통해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을 하게 된다.

 

동학 농민 운동 (1894)

동학 퇴치를 위해 청군을 끌어들였다. 조선 땅에 청과 일의 군을 동수로 둔다는 텐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왔다.

 

을미사변 (1895)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乙未事變) 이 일어났다.

 

을사늑약 (1905)

 

조선의 국모?

여러 드라마와 뮤지컬에서 명성황후를 조선의 국모로 받든다. 과도한 해석은 아닐까? 과도한 민족주의의 발로는 아닐까? “미스터 션샤인”이 그리는 고종의 모습도 과도한 것은 아닐까?

‘명성황후 (明成皇后)’, 그리고 ‘민비 (閔妃)’. 호칭도 논란이다. 민비로 부르는 것이 격을 낮춘다는 의견이 있다. 일본이 의도한 바라는 의견이 있는데, 근거가 있는 말인지 알 수 없다.

 

References

  • 매천야록, 황현
  • 한국통사, 박은식

Written by Chris Choi

August 23, 2019 at 1:4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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